너는 내 운명. 나는 사실 이 영화의 제목이 애초에 맘에 들지 않았다. 너는 내 운명이라니, 아주 통속적이고 촌스럽기로 작정을 하지 않은 다음에야 이런 제목을 쓸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제목이 극중에서 나오는 잡지 기사의 제목이었다는 걸 알고는 고개가 끄덕여 졌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리고 다음에 따온 필름 2.0의 박진표감독과의 인터뷰를 보고 나서 나는 영화속에 나온 백종학이 연기한 기자가 바로 감독 자신의 모습이라 고백하는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떻게 보면 이중적이다. 신파스러움을 무릅쓰고 너는 내 운명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면서 정말 지순한 뭔가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결국에는 남의 얘기를 결국 통속적인 잡지스토리로 만드는 그런 사람과 동일인임을 고백한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런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는 신파로 통하는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현실은 이것과는 사뭇다르니까.
아무튼 박진표감독 마음에 든다. 영화속에 나오는 "봄날은 간다"를 두고 허진호 감독에 대한 일종의 오마쥬라고 하는 부분을 두고 통하는 느낌이 들고. 다만 인터뷰끝의 그의 말대로 다음 영화는 좀 더 세련된 영화가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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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박한 세상, 순정으로 간다 박진표 감독과 <너는 내 운명>을 논하다
[필름 2.0 2005-09-22 18:50] 메일로 보내기 | 프린트
<죽어도 좋아> 박진표 감독의 신작 <너는 내 운명>이 화제다. 황정민, 전도연 두 배우의 연기에도 시선이 가지만 감독 스스로 '통속 사랑극'이라 명명한 뒤 신파 멜로의 관습을 정면으로 뚫고 들어가며 할 말을 토해내는 방식에 모두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순정파 시골 노총각 석중(황정민)과 에이즈에 걸린 다방 여종업원 은하(전도연)의 세상을 돌파하는 사랑 속에 감독은 무엇을 담고자 했던 것일까. 영화평론가 이상용이 박진표 감독과의 긴 인터뷰를 통해 <너는 내 운명>을 분석한다.
<죽어도 좋아>는 박진표 감독을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그 이상의 편견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박진표 감독은 <너는 내 운명>을 상업 영화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오랫동안 TV 다큐멘터리를 연출했고, 그러한 방식이 친숙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잘 알려진 배우들과 함께 상업 장편영화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보아온 한 평론가의 눈에는 여전히 표가 난다. 그것은 삶의 현장을 가감 없이 다루는 그의 연출 태도에 기인한다. <너는 내 운명>에는 김석중 역을 맡은 황정민이 소의 출산을 돕는 장면이 있다. 박진표 감독은 이 장면을 촬영하면서 일부러 조명을 아꼈다. 소가 워낙 예민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촬영 후에는 전 스탭들이 울기도 했다. 영화와는 별개로 출산이라는 자연 행위가 주는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정민은 이 장면 촬영을 위해 예행 연습을 미리 했다고 한다. 액션을 위해 무술을 배우듯이, 출산 장면을 위해서는 당연히 출산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노력을 마땅히 기울이는 배우들과 함께할 수 있어 박진표 감독은 자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본격적인 자신의 첫 상업 영화에 좋은 배우들을 만날 수 있었다며 칭찬을 거듭 아끼지 않았다. 주연배우들은 물론이고, 조연들까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감정들을 잘 표현해 주었다. 이러한 신파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영화를 할 때 배우들이 어설펐다면 쉽게 무너졌을 것이다.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는 마음대로 찍은 후 편집하면 그만이었지만 상업 영화는 처음부터 줄이고, 버리는 작업이었다. 개인적으로 에이즈에 걸린 여자를 사랑하는 시골 남자의 이야기는 줄거리를 예고편에서 보았을 때 꽤 신파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된 후 5분 동안의 장면은 박진표 감독의 새로운 출발을 잘 보여 주고 있었다.
실화와 영화 사이, 다큐멘터리와 허구 사이
처음 극장에서 예고편을 봤을 때는 전형적인 신파 멜로 같았다. 솔직히 예고편을 보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예고편은 본인이 의도한 것인가?
예고편은 내 맘대로 한 것은 아니었다. 워낙 잘하는 곳이어서 제작사인 영화사봄의 마케팅을 믿고 따랐다. 80년대식 예고편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좀 그랬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예고편만 보고도 울컥 하는 게 있다고 하니까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웃음)
실화에 바탕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소재는 언제 잡았나?
2002년 12월에 <죽어도 좋아>를 개봉하고나서 취재를 시작했다. 원래 에이즈 걸린 여인에 관한 기사는 2002년 6월에 났었다. 그때는 신문 기사를 오려서 갖고만 있었다. 버릇이 되어 있는 일이다. 그런데 2003년 초겨울에 재판에 관한 기사가 났다. 궁금해서 재판이 열리는 경남에 있는 법정에 갔다. 그랬더니 법정에 어떤 남자가 와 있었다. 그 남자가 남편이었다. 영화 속 기자가 그랬던 것처럼 남편이 있는 줄은 몰랐다. 재판이 끝나고 그와 막걸리를 마시러 갔다. 밤새 시장통에서 마셨다. 새벽에 그 남자의 집에 갔다. 옛날의 사진을 봤다. 그날 더 이상 딴 것 안 물어보고 영화를 찍기로 결심했다. 당시에는 정말 축복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신세를 지고 난 후 남자와 함께 면회를 갔다. 여자가 나오더라. 사실 영화의 이미지와 실제 모습은 많이 다르다. 5분 정도 면회를 하고 나서 초고를 두 달 정도 썼다. 그리고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다시 내려가 영화를 만들겠다는 허락을 받았다. 영화사에서 생활비도 좀 드리고 그랬다. 두 사람은 지금도 잘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 은하가 곧 죽을 것처럼 느껴졌다. 은하의 상태에 대해 정확히 전달하지는 않은 것 같다. 시사회가 끝난 후 기자회견 내용을 보니 그녀가 보균자라고 해서 놀랐다. 에이즈 환자와 에이즈 보균자는 좀 다른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감염된 상태가 바로 보균자다. 에이즈의 잠복 기간은 2년에서 10년 정도로 보는데 평생 발현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영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은 게, 워낙 보균자라는 것이 감기와 다르지 않은 상태니까 특별할 것이 없었다. 예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 AD를 하던 시절에 에이즈 환자와 3박 4일 정도 동행 취재한 적이 있다. 에이즈 환자조차도 성 접촉이나 상처의 접촉이 없으면 별 문제가 없다. 취재를 하는 동안 함께 여관방을 쓰고, 찌개도 같이 먹었다. 환자도 별다를 게 없다. 굳이 영화에서 신경을 쓴 것이 있다면 에이즈 환자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여주인공이 예뻐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굉장히 전략적인 것이다.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한두 사람이라도 '별 다를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민감하게 드러나면 상업 영화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에이즈 문제와 같은 것은 안으로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박진표의 직설화법을 될 수 있으면 가리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런 마음이었다면 실화라는 것을 밝히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영화는 시작부터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자막을 내보낸다. 지금 이야기하고는 조금 상충되는 느낌인데.
실화를 밝힌 이유는 처음부터 정보가 새나갔기 때문이다. 마케팅 단계에서는 에이즈 이야기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초반 한 신문에 전도연 씨 캐스팅 이야기가 나갔는데, 그녀가 에이즈 환자라는 소개글이 나갔다. 고민을 많이 했는데 솔직하게 전후 사정을 밝히고 가는 것이 더 진심을 잘 전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밝히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인가?
그렇다.(웃음)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고 저 사람도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매번 실화만 하니까 일종의 콤플렉스가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상상력 운운하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영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거나 실화에서 차용한 것은 설정 정도이지 허구가 대부분이다.
영화 초반을 보면 농촌의 현실을 보여 주는 장면이 꽤 많다. 시골 남자들이 베트남이나 필리핀 여자를 구하는 과정도 등장하고, 돼지가 콜레라에 감염돼 도살되는 장면도 나온다. 그래서 신파 영화와는 다를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농촌 현실을 담는 것은 이전 영화의 작업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현실을 담은 장면이 더 많았다. 시나리오를 다듬으면서 많이 줄였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그런데 초고를 보고 난 후 영화사에서 당신 도대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왜 이렇게 욕심이 많으냐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시사 다큐멘터리를 오래한 탓인지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농촌 현실, 신부 수입 문제, 아내 구타, 폭력 남편, 시골 다방 등. 우리의 현실이 어둡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통계적으로 대한민국 남편의 10명 중 6명이 때리는 남자다. 그 6명의 아내 중 4명은 구타를 당한 후 강간을 당한다. 일종의 부부 강간이다. 다음날 남자는 싹싹 빈다. 이것은 통계에도 나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이런 사실들을 숨겨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 주인공 석중의 친구 중에 필리핀 처녀와 결혼한 인물이 있다. 이들 부부도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영화는 그들 사이를 호의적으로만 다루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취재한 적이 있다.(웃음) 사실은 대다수가 별로 안 좋다. 여자를 데리고 왔을 때 부딪히는 문제가 많다. 통계적으로 보면 열 명 중 두 쌍 정도가 잘산다.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번 영화를 보면 커플로 맺어지는 인물 관계가 많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필리핀에서 온 여자도 사랑을 받으면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콜레라에 걸린 돼지를 파묻는 장면도 진짜 암울하게 표현할 수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돼지를 파묻을 때에도 대화를 밝게 가져갔다. 시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세상을 그리는 것이니까.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중에서 장점을 먼저 보고 싶다.
그렇게 보면 등장인물 중 예외가 은하의 전 남편이다. 은하의 전 남편은 사창가에 있는 은하를 고발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다른 측면에서도 이야기할 수가 있다. 박진표 감독의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 중 하나는 섹스를 다룬다는 것인데, 이번 영화에서 석중과 은하의 정사 장면은 과도한 노출이나 파격적인 것이 없다. 그런데 전 남편과의 섹스 장면은 꽤 폭력적으로 보인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백 선생이 아내와 섹스를 하는 장면에서 후체위를 사용한다. <너는 내 운명>에서 전 남편과의 섹스 장면도 그렇다. 꽤 관습적이면서 한국영화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폭력 묘사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두 가지다. 개인적으로는 은하의 전 남편인 천수가 신고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울컥해서 천수가 석중에게 내가 신고했다고 말했지만, 신고를 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천수라는 인물 역시 은하를 잊지 못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천수가 가족 폭력을 재현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때린다, 강간한다, 그리고 나서 싹싹 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것은 일종의 가정 폭력 공식이다.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거라 생각했고, 개인적으로는 통계를 믿었다. 그리고 후체위 역시 이유가 있다. 강간이라는 것이 정상위로는 불가능하다. 죽도록 맞아서 기절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래서 많은 감독들이 강간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은하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면 그렇게 맞고 당하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천수가 등장하는 순간이야말로 은하의 과거를 표현하는 극적인 순간을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천수라는 인물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강간 장면을 두고 마케팅팀에서도 이의 제기를 했고, 밤새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결론이 나지는 않은 이야기였는데, 논리적으로 쓴 장면은 아니었고, 나 역시 남성인지라 잠재 의식 속에 담겨 있어서 그리 되지 않았을까.(웃음)
변화된 형식
이번 영화에는 형식적인 변화가 뚜렷이 보인다. <죽어도 좋아>의 경우에는 롱 샷과 풀 샷으로 지켜보는 장면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선 클로즈업이 지배적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상업 영화를 하겠다는 결심 때문이다. 그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하나의 테이크로 멀리서 잡았다. 하지만 상업 영화의 관습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클로즈업이 가지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사회장에서 보니까 클로즈업이 정말 많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초반부를 보면 클로즈업으로 시작해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면서 전체 배경을 보여 주거나 좌우로 움직이면서 공간을 보여 주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전체 화면을 보여주고 난 후에 클로즈업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영화는 거꾸로 간다.
일종의 화법인 것 같다. 박진표식 직설화법. 성격 자체도 그렇고, 말 자체도 그렇고, 결론부터 보여 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보여 주는 것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때로는 이런 방식 때문에 오해를 사기도 한다. 하지만 <죽어도 좋아>, <신비한 영화나라>(<여섯 개의 시선>의 한 에피소드)는 보여 주지 않으면 믿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꼭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전작들보다 노출이 덜하다. 왜냐하면 보여 주지 않아도 설명되고 이들의 사랑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화법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 스타일에 대한 욕구가 왜 없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죽어도 좋아>를 보고 테크닉도 없는 감독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아름답게 찍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스타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가 중요했다. 그 이야기에 맞는 스타일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영화를 두고 ‘통속 사랑극’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붙인 명칭인데, 이렇게 규정하고 나서 뻔뻔하게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세련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경우 세련미는 오히려 진심을 전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 하지만 영화의 재미와 감동의 문제를 떠나 촌스럽고 유치하고 뻔뻔하게 만들었구나, 라는 생각은 솔직히 했다.(웃음)
이전 영화와는 달리 판타지 장면도 있다. 은하가 감옥에서 얼굴에 종기가 난 것 같은 착시 현상을 겪거나 남편과 밤길을 거닐던 환상을 감옥에서 느끼는 장면이 있다. 이렇게 판타지를 집어넣은 것은 해보고 싶은 것을 마음껏 다뤄보자는 욕심 때문이었나?
그 장면은 전도연 씨도 고민했던 부분이다. 에이즈라는 것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고통이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병도 아니고 해서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여하튼 제작진이 내린 결론은 죽음보다 더 외로울 것이다, 죽음은 잽도 안될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가장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게 판타지인데 한 영화를 통해 용기를 얻게 됐다.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인데 영화 속에서 주인공 둘이 여관에 갔다가 물고기들이 천정과 벽을 살아 움직이는 장면이 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내 운명>의 사연이 보편적으로는 믿기 힘든 사랑의 이야기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울트라 판타지를 끄집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업 영화적인 관습도 꽤 많다. 여주인공이 습관처럼 하는 동전 던지기를 남자 주인공이 해본다든가, 석중과 그의 친구들이 사용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을 은하가 후에 쓰는 등 관습적인 대사의 반복이 꽤 두드러진다. 반면 초반부에서 보여지는 농촌의 현실이라든가, 중반부에서 불거져 나오는 에이즈 문제가 뒤로 갈수록 약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의 관습이 강해지면서 끝에서는 운명적인 로맨스로 봉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러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안창호 선생의 말은 도산공원에 갔다가 본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 문구를 젊은이들이 보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그런 것 하나하나가 영화에 잘 녹아 있으면 나중에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감독을 두고 최소한 쌈마이는 아니라고 생각해 줄 것 같았다.(웃음) 그 말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다. 동전의 경우에는 여자 캐릭터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기사로 사연을 처음 접한 게 2002년도 6월이라고 했는데, 영화에서 2002년 월드컵을 명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도 일종의 현실 집착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 당시 여러 보도를 접하면서 너무 웃겼다. 나도 열광하면서 뛰어다니기도 했지만 텔레비전이나 신문의 사진을 보면 장례식장에서 상주들이 환호하는 장면들이 등장했다. 아이러니한 현실처럼 느껴졌다. 정말 죽은 사람만 억울하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애국심이 어디서 나왔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그래서 영화에 집어넣었다. 없는 이야기 만든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시사회장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진짜 월드컵 때 저랬냐.”
영화 밖의 현실을 지시하는 또 하나의 장면으로 꼽을 수 있는 게, 두 사람이 자동차 극장에서 보는 영화가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였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대사가 나오는 장면이 재미있기는 했지만, 굳이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가 있는가?
일종의 오마주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개인적으로는 사랑이 변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에서는 사랑을 믿고 싶고, 보고 싶으니까 이런 영화를 만드는 거다. <봄날은 간다>를 쓴 이유는 남녀가 데이트를 하면 시골에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나왔다. 영화에 등장하는 첫 데이트니까 극장에 갈 만하겠구나 싶었다. 무슨 영화를 볼까 하다가 <봄날은 간다>가 떠올랐다. 실제로 이 영화가 개봉한 것과는 두세 달 정도 시간상의 차이가 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도 그렇고, 허진호 감독의 영화 이야기도 그렇고 의외로 멜로영화를 상당히 좋아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영화를 읽기보다는 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빨려들어가 함께 감동하는 것이 좋다. 장르로는 멜로영화가 아닌가 싶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첨밀밀>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도 좋아하고.
캐릭터의 정체성, 감독의 정체성
]하층 계급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죽어도 좋아>의 노인에 대한 관심도 그렇고, <신비한 영어나라>는 중산층의 허위 의식을 공격하고 있다. 아무래도 박진표 감독은 계급 의식이 뚜렷하게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은 전혀 없다. 나름대로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났고, 20대 후반부터 30대 중후반까지는 돈을 잘 받는 방송국의 월급쟁이로 지냈다. 최근 몇 년은 가난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현재 강남에 살고 있다. 물론 아버지 소유의 집이다.(웃음) 하위 계층에 속하거나 일부러 건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일종의 성향인 것 같다. 정말 단순하게 이러한 현실을 못참겠다는 저항심. 돌이켜 보면 27세에 제대하고 방송국에서 했던 일들, 버릇처럼 만났던 사람들이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인물들이었다.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그들과 술 마시고 살다보니까 굳어진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아니고, 많이 놀면서 지냈고, 왜 이렇게 변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더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집안이나 주변에서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집안에서는 워낙 직설적인 성향을 아니까 별 이야기는 안 하는데, 어릴 때 친구들이 좀 놀란다. 단적인 예로 박중훈 씨가 대학 동창인데 처음에 시나리오 써서 보여 줬더니 “넌 시골에서 살아보지도 않은 놈이 좀 어울리는 영화를 만들어라”고 하더라.(웃음)
<죽어도 좋아>나 <너는 내 운명>을 보면 순정이라는 것을 아주 긍정적으로 옹호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죽어도 좋아>를 두고 다큐멘터리라고 생각을 많이 했지만, 어쩌면 박진표의 영화는 그 때부터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순정을 강하게 옹호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다. 세상은 각박하지 않은가. 그런데 병든 와중에도 예쁜 게 보인다. 그런 것을 보고 표현하면서 조금이라도 물들이고 싶다. 물론 이런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전작을 보고 내 영화를 하나의 맥락으로 봐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러다 보면 또 하나의 선입견이 생길 것 같다. <죽어도 좋아>를 본 후 부모님이 각방을 쓰시다가 킹 사이즈 침대를 들여놓게 됐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자연스러운 감응이다. <너는 내 운명>은 전도연 씨와 황정민 씨의 뛰어난 연기에 기댄 순정 영화라고 알려졌으면 좋겠다. 지금 개봉 전이어서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아시다시피 <죽어도 좋아> 때 많은 일을 겪어서 사실 두렵다. 많은 관심 때문에 득도 보았지만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도 든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이 있겠지만 될 수 있으면 많은 것을 자연스럽게 봐주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고민은 되지 않는가. 대중 영화로서의 규범도 따라야 하지만, 워낙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보니 여러 가지 갈등이 생겼을 것 같다.
예전에 다큐멘터리 작업을 했을 때는 마음껏 촬영하고, 많은 이야기를 내레이션을 깔아 편집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 세웠던 원칙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변하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것을 토대로 다듬을 수가 있었다. 다음 영화 때는 스트레스를 덜 받지 않을까 싶다. 열 마디를 하고 싶어도 세 마디를 할 수도 있다. 그러한 방식을 이번엔 많이 배운 것 같다. 표현 방식이 직설적이었던 것을 돌려서 말할 수 있다. 다음 영화는 조금 더 세련되지 않을까 싶다.
사진 김춘호 기자
이상용(영화평론가)
하지만 이 제목이 극중에서 나오는 잡지 기사의 제목이었다는 걸 알고는 고개가 끄덕여 졌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리고 다음에 따온 필름 2.0의 박진표감독과의 인터뷰를 보고 나서 나는 영화속에 나온 백종학이 연기한 기자가 바로 감독 자신의 모습이라 고백하는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떻게 보면 이중적이다. 신파스러움을 무릅쓰고 너는 내 운명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면서 정말 지순한 뭔가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결국에는 남의 얘기를 결국 통속적인 잡지스토리로 만드는 그런 사람과 동일인임을 고백한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런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는 신파로 통하는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현실은 이것과는 사뭇다르니까.
아무튼 박진표감독 마음에 든다. 영화속에 나오는 "봄날은 간다"를 두고 허진호 감독에 대한 일종의 오마쥬라고 하는 부분을 두고 통하는 느낌이 들고. 다만 인터뷰끝의 그의 말대로 다음 영화는 좀 더 세련된 영화가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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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박한 세상, 순정으로 간다 박진표 감독과 <너는 내 운명>을 논하다
[필름 2.0 2005-09-22 18:50] 메일로 보내기 | 프린트
<죽어도 좋아> 박진표 감독의 신작 <너는 내 운명>이 화제다. 황정민, 전도연 두 배우의 연기에도 시선이 가지만 감독 스스로 '통속 사랑극'이라 명명한 뒤 신파 멜로의 관습을 정면으로 뚫고 들어가며 할 말을 토해내는 방식에 모두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순정파 시골 노총각 석중(황정민)과 에이즈에 걸린 다방 여종업원 은하(전도연)의 세상을 돌파하는 사랑 속에 감독은 무엇을 담고자 했던 것일까. 영화평론가 이상용이 박진표 감독과의 긴 인터뷰를 통해 <너는 내 운명>을 분석한다.
<죽어도 좋아>는 박진표 감독을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그 이상의 편견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박진표 감독은 <너는 내 운명>을 상업 영화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오랫동안 TV 다큐멘터리를 연출했고, 그러한 방식이 친숙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잘 알려진 배우들과 함께 상업 장편영화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보아온 한 평론가의 눈에는 여전히 표가 난다. 그것은 삶의 현장을 가감 없이 다루는 그의 연출 태도에 기인한다. <너는 내 운명>에는 김석중 역을 맡은 황정민이 소의 출산을 돕는 장면이 있다. 박진표 감독은 이 장면을 촬영하면서 일부러 조명을 아꼈다. 소가 워낙 예민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촬영 후에는 전 스탭들이 울기도 했다. 영화와는 별개로 출산이라는 자연 행위가 주는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정민은 이 장면 촬영을 위해 예행 연습을 미리 했다고 한다. 액션을 위해 무술을 배우듯이, 출산 장면을 위해서는 당연히 출산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노력을 마땅히 기울이는 배우들과 함께할 수 있어 박진표 감독은 자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본격적인 자신의 첫 상업 영화에 좋은 배우들을 만날 수 있었다며 칭찬을 거듭 아끼지 않았다. 주연배우들은 물론이고, 조연들까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감정들을 잘 표현해 주었다. 이러한 신파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영화를 할 때 배우들이 어설펐다면 쉽게 무너졌을 것이다.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는 마음대로 찍은 후 편집하면 그만이었지만 상업 영화는 처음부터 줄이고, 버리는 작업이었다. 개인적으로 에이즈에 걸린 여자를 사랑하는 시골 남자의 이야기는 줄거리를 예고편에서 보았을 때 꽤 신파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된 후 5분 동안의 장면은 박진표 감독의 새로운 출발을 잘 보여 주고 있었다.
실화와 영화 사이, 다큐멘터리와 허구 사이
처음 극장에서 예고편을 봤을 때는 전형적인 신파 멜로 같았다. 솔직히 예고편을 보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예고편은 본인이 의도한 것인가?
예고편은 내 맘대로 한 것은 아니었다. 워낙 잘하는 곳이어서 제작사인 영화사봄의 마케팅을 믿고 따랐다. 80년대식 예고편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좀 그랬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예고편만 보고도 울컥 하는 게 있다고 하니까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웃음)
실화에 바탕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소재는 언제 잡았나?
2002년 12월에 <죽어도 좋아>를 개봉하고나서 취재를 시작했다. 원래 에이즈 걸린 여인에 관한 기사는 2002년 6월에 났었다. 그때는 신문 기사를 오려서 갖고만 있었다. 버릇이 되어 있는 일이다. 그런데 2003년 초겨울에 재판에 관한 기사가 났다. 궁금해서 재판이 열리는 경남에 있는 법정에 갔다. 그랬더니 법정에 어떤 남자가 와 있었다. 그 남자가 남편이었다. 영화 속 기자가 그랬던 것처럼 남편이 있는 줄은 몰랐다. 재판이 끝나고 그와 막걸리를 마시러 갔다. 밤새 시장통에서 마셨다. 새벽에 그 남자의 집에 갔다. 옛날의 사진을 봤다. 그날 더 이상 딴 것 안 물어보고 영화를 찍기로 결심했다. 당시에는 정말 축복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신세를 지고 난 후 남자와 함께 면회를 갔다. 여자가 나오더라. 사실 영화의 이미지와 실제 모습은 많이 다르다. 5분 정도 면회를 하고 나서 초고를 두 달 정도 썼다. 그리고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다시 내려가 영화를 만들겠다는 허락을 받았다. 영화사에서 생활비도 좀 드리고 그랬다. 두 사람은 지금도 잘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 은하가 곧 죽을 것처럼 느껴졌다. 은하의 상태에 대해 정확히 전달하지는 않은 것 같다. 시사회가 끝난 후 기자회견 내용을 보니 그녀가 보균자라고 해서 놀랐다. 에이즈 환자와 에이즈 보균자는 좀 다른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감염된 상태가 바로 보균자다. 에이즈의 잠복 기간은 2년에서 10년 정도로 보는데 평생 발현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영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은 게, 워낙 보균자라는 것이 감기와 다르지 않은 상태니까 특별할 것이 없었다. 예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 AD를 하던 시절에 에이즈 환자와 3박 4일 정도 동행 취재한 적이 있다. 에이즈 환자조차도 성 접촉이나 상처의 접촉이 없으면 별 문제가 없다. 취재를 하는 동안 함께 여관방을 쓰고, 찌개도 같이 먹었다. 환자도 별다를 게 없다. 굳이 영화에서 신경을 쓴 것이 있다면 에이즈 환자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여주인공이 예뻐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굉장히 전략적인 것이다.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한두 사람이라도 '별 다를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민감하게 드러나면 상업 영화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에이즈 문제와 같은 것은 안으로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박진표의 직설화법을 될 수 있으면 가리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런 마음이었다면 실화라는 것을 밝히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영화는 시작부터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자막을 내보낸다. 지금 이야기하고는 조금 상충되는 느낌인데.
실화를 밝힌 이유는 처음부터 정보가 새나갔기 때문이다. 마케팅 단계에서는 에이즈 이야기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초반 한 신문에 전도연 씨 캐스팅 이야기가 나갔는데, 그녀가 에이즈 환자라는 소개글이 나갔다. 고민을 많이 했는데 솔직하게 전후 사정을 밝히고 가는 것이 더 진심을 잘 전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밝히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인가?
그렇다.(웃음)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고 저 사람도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매번 실화만 하니까 일종의 콤플렉스가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상상력 운운하는 것은 욕심일 뿐이다. 영화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거나 실화에서 차용한 것은 설정 정도이지 허구가 대부분이다.
영화 초반을 보면 농촌의 현실을 보여 주는 장면이 꽤 많다. 시골 남자들이 베트남이나 필리핀 여자를 구하는 과정도 등장하고, 돼지가 콜레라에 감염돼 도살되는 장면도 나온다. 그래서 신파 영화와는 다를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농촌 현실을 담는 것은 이전 영화의 작업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현실을 담은 장면이 더 많았다. 시나리오를 다듬으면서 많이 줄였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그런데 초고를 보고 난 후 영화사에서 당신 도대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왜 이렇게 욕심이 많으냐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시사 다큐멘터리를 오래한 탓인지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농촌 현실, 신부 수입 문제, 아내 구타, 폭력 남편, 시골 다방 등. 우리의 현실이 어둡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통계적으로 대한민국 남편의 10명 중 6명이 때리는 남자다. 그 6명의 아내 중 4명은 구타를 당한 후 강간을 당한다. 일종의 부부 강간이다. 다음날 남자는 싹싹 빈다. 이것은 통계에도 나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면서 이런 사실들을 숨겨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 주인공 석중의 친구 중에 필리핀 처녀와 결혼한 인물이 있다. 이들 부부도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영화는 그들 사이를 호의적으로만 다루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취재한 적이 있다.(웃음) 사실은 대다수가 별로 안 좋다. 여자를 데리고 왔을 때 부딪히는 문제가 많다. 통계적으로 보면 열 명 중 두 쌍 정도가 잘산다. 개인적으로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이번 영화를 보면 커플로 맺어지는 인물 관계가 많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필리핀에서 온 여자도 사랑을 받으면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콜레라에 걸린 돼지를 파묻는 장면도 진짜 암울하게 표현할 수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돼지를 파묻을 때에도 대화를 밝게 가져갔다. 시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내가 보고 싶은 세상을 그리는 것이니까.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중에서 장점을 먼저 보고 싶다.
그렇게 보면 등장인물 중 예외가 은하의 전 남편이다. 은하의 전 남편은 사창가에 있는 은하를 고발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다른 측면에서도 이야기할 수가 있다. 박진표 감독의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 중 하나는 섹스를 다룬다는 것인데, 이번 영화에서 석중과 은하의 정사 장면은 과도한 노출이나 파격적인 것이 없다. 그런데 전 남편과의 섹스 장면은 꽤 폭력적으로 보인다. <친절한 금자씨>에서도 백 선생이 아내와 섹스를 하는 장면에서 후체위를 사용한다. <너는 내 운명>에서 전 남편과의 섹스 장면도 그렇다. 꽤 관습적이면서 한국영화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폭력 묘사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두 가지다. 개인적으로는 은하의 전 남편인 천수가 신고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울컥해서 천수가 석중에게 내가 신고했다고 말했지만, 신고를 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천수라는 인물 역시 은하를 잊지 못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천수가 가족 폭력을 재현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때린다, 강간한다, 그리고 나서 싹싹 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것은 일종의 가정 폭력 공식이다.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거라 생각했고, 개인적으로는 통계를 믿었다. 그리고 후체위 역시 이유가 있다. 강간이라는 것이 정상위로는 불가능하다. 죽도록 맞아서 기절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래서 많은 감독들이 강간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은하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면 그렇게 맞고 당하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천수가 등장하는 순간이야말로 은하의 과거를 표현하는 극적인 순간을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천수라는 인물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강간 장면을 두고 마케팅팀에서도 이의 제기를 했고, 밤새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결론이 나지는 않은 이야기였는데, 논리적으로 쓴 장면은 아니었고, 나 역시 남성인지라 잠재 의식 속에 담겨 있어서 그리 되지 않았을까.(웃음)
변화된 형식
이번 영화에는 형식적인 변화가 뚜렷이 보인다. <죽어도 좋아>의 경우에는 롱 샷과 풀 샷으로 지켜보는 장면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선 클로즈업이 지배적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상업 영화를 하겠다는 결심 때문이다. 그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하나의 테이크로 멀리서 잡았다. 하지만 상업 영화의 관습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클로즈업이 가지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사회장에서 보니까 클로즈업이 정말 많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초반부를 보면 클로즈업으로 시작해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면서 전체 배경을 보여 주거나 좌우로 움직이면서 공간을 보여 주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전체 화면을 보여주고 난 후에 클로즈업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영화는 거꾸로 간다.
일종의 화법인 것 같다. 박진표식 직설화법. 성격 자체도 그렇고, 말 자체도 그렇고, 결론부터 보여 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보여 주는 것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때로는 이런 방식 때문에 오해를 사기도 한다. 하지만 <죽어도 좋아>, <신비한 영화나라>(<여섯 개의 시선>의 한 에피소드)는 보여 주지 않으면 믿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꼭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전작들보다 노출이 덜하다. 왜냐하면 보여 주지 않아도 설명되고 이들의 사랑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화법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 스타일에 대한 욕구가 왜 없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죽어도 좋아>를 보고 테크닉도 없는 감독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아름답게 찍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스타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가 중요했다. 그 이야기에 맞는 스타일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영화를 두고 ‘통속 사랑극’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붙인 명칭인데, 이렇게 규정하고 나서 뻔뻔하게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세련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경우 세련미는 오히려 진심을 전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 하지만 영화의 재미와 감동의 문제를 떠나 촌스럽고 유치하고 뻔뻔하게 만들었구나, 라는 생각은 솔직히 했다.(웃음)
이전 영화와는 달리 판타지 장면도 있다. 은하가 감옥에서 얼굴에 종기가 난 것 같은 착시 현상을 겪거나 남편과 밤길을 거닐던 환상을 감옥에서 느끼는 장면이 있다. 이렇게 판타지를 집어넣은 것은 해보고 싶은 것을 마음껏 다뤄보자는 욕심 때문이었나?
그 장면은 전도연 씨도 고민했던 부분이다. 에이즈라는 것을 경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고통이 있을지 알 수가 없다.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병도 아니고 해서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여하튼 제작진이 내린 결론은 죽음보다 더 외로울 것이다, 죽음은 잽도 안될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가장 쉽게 표현할 수 있는 게 판타지인데 한 영화를 통해 용기를 얻게 됐다. 좋아하는 영화 중의 하나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인데 영화 속에서 주인공 둘이 여관에 갔다가 물고기들이 천정과 벽을 살아 움직이는 장면이 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내 운명>의 사연이 보편적으로는 믿기 힘든 사랑의 이야기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울트라 판타지를 끄집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업 영화적인 관습도 꽤 많다. 여주인공이 습관처럼 하는 동전 던지기를 남자 주인공이 해본다든가, 석중과 그의 친구들이 사용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을 은하가 후에 쓰는 등 관습적인 대사의 반복이 꽤 두드러진다. 반면 초반부에서 보여지는 농촌의 현실이라든가, 중반부에서 불거져 나오는 에이즈 문제가 뒤로 갈수록 약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의 관습이 강해지면서 끝에서는 운명적인 로맨스로 봉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러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안창호 선생의 말은 도산공원에 갔다가 본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 문구를 젊은이들이 보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그런 것 하나하나가 영화에 잘 녹아 있으면 나중에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 감독을 두고 최소한 쌈마이는 아니라고 생각해 줄 것 같았다.(웃음) 그 말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다. 동전의 경우에는 여자 캐릭터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기사로 사연을 처음 접한 게 2002년도 6월이라고 했는데, 영화에서 2002년 월드컵을 명시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도 일종의 현실 집착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 당시 여러 보도를 접하면서 너무 웃겼다. 나도 열광하면서 뛰어다니기도 했지만 텔레비전이나 신문의 사진을 보면 장례식장에서 상주들이 환호하는 장면들이 등장했다. 아이러니한 현실처럼 느껴졌다. 정말 죽은 사람만 억울하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애국심이 어디서 나왔을까 아직도 의문이다. 그래서 영화에 집어넣었다. 없는 이야기 만든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시사회장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진짜 월드컵 때 저랬냐.”
영화 밖의 현실을 지시하는 또 하나의 장면으로 꼽을 수 있는 게, 두 사람이 자동차 극장에서 보는 영화가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였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대사가 나오는 장면이 재미있기는 했지만, 굳이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가 있는가?
일종의 오마주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개인적으로는 사랑이 변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에서는 사랑을 믿고 싶고, 보고 싶으니까 이런 영화를 만드는 거다. <봄날은 간다>를 쓴 이유는 남녀가 데이트를 하면 시골에서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나왔다. 영화에 등장하는 첫 데이트니까 극장에 갈 만하겠구나 싶었다. 무슨 영화를 볼까 하다가 <봄날은 간다>가 떠올랐다. 실제로 이 영화가 개봉한 것과는 두세 달 정도 시간상의 차이가 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도 그렇고, 허진호 감독의 영화 이야기도 그렇고 의외로 멜로영화를 상당히 좋아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영화를 읽기보다는 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빨려들어가 함께 감동하는 것이 좋다. 장르로는 멜로영화가 아닌가 싶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첨밀밀>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도 좋아하고.
캐릭터의 정체성, 감독의 정체성
]하층 계급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죽어도 좋아>의 노인에 대한 관심도 그렇고, <신비한 영어나라>는 중산층의 허위 의식을 공격하고 있다. 아무래도 박진표 감독은 계급 의식이 뚜렷하게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은 전혀 없다. 나름대로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났고, 20대 후반부터 30대 중후반까지는 돈을 잘 받는 방송국의 월급쟁이로 지냈다. 최근 몇 년은 가난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현재 강남에 살고 있다. 물론 아버지 소유의 집이다.(웃음) 하위 계층에 속하거나 일부러 건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일종의 성향인 것 같다. 정말 단순하게 이러한 현실을 못참겠다는 저항심. 돌이켜 보면 27세에 제대하고 방송국에서 했던 일들, 버릇처럼 만났던 사람들이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인물들이었다.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그들과 술 마시고 살다보니까 굳어진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아니고, 많이 놀면서 지냈고, 왜 이렇게 변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더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집안이나 주변에서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집안에서는 워낙 직설적인 성향을 아니까 별 이야기는 안 하는데, 어릴 때 친구들이 좀 놀란다. 단적인 예로 박중훈 씨가 대학 동창인데 처음에 시나리오 써서 보여 줬더니 “넌 시골에서 살아보지도 않은 놈이 좀 어울리는 영화를 만들어라”고 하더라.(웃음)
<죽어도 좋아>나 <너는 내 운명>을 보면 순정이라는 것을 아주 긍정적으로 옹호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죽어도 좋아>를 두고 다큐멘터리라고 생각을 많이 했지만, 어쩌면 박진표의 영화는 그 때부터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순정을 강하게 옹호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다. 세상은 각박하지 않은가. 그런데 병든 와중에도 예쁜 게 보인다. 그런 것을 보고 표현하면서 조금이라도 물들이고 싶다. 물론 이런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전작을 보고 내 영화를 하나의 맥락으로 봐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러다 보면 또 하나의 선입견이 생길 것 같다. <죽어도 좋아>를 본 후 부모님이 각방을 쓰시다가 킹 사이즈 침대를 들여놓게 됐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자연스러운 감응이다. <너는 내 운명>은 전도연 씨와 황정민 씨의 뛰어난 연기에 기댄 순정 영화라고 알려졌으면 좋겠다. 지금 개봉 전이어서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아시다시피 <죽어도 좋아> 때 많은 일을 겪어서 사실 두렵다. 많은 관심 때문에 득도 보았지만 한편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도 든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이 있겠지만 될 수 있으면 많은 것을 자연스럽게 봐주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고민은 되지 않는가. 대중 영화로서의 규범도 따라야 하지만, 워낙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보니 여러 가지 갈등이 생겼을 것 같다.
예전에 다큐멘터리 작업을 했을 때는 마음껏 촬영하고, 많은 이야기를 내레이션을 깔아 편집했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 세웠던 원칙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변하지 않는다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것을 토대로 다듬을 수가 있었다. 다음 영화 때는 스트레스를 덜 받지 않을까 싶다. 열 마디를 하고 싶어도 세 마디를 할 수도 있다. 그러한 방식을 이번엔 많이 배운 것 같다. 표현 방식이 직설적이었던 것을 돌려서 말할 수 있다. 다음 영화는 조금 더 세련되지 않을까 싶다.
사진 김춘호 기자
이상용(영화평론가)
Written by 흐린날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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