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로 말하자면.. 매우 전형적인 경상도남자이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라 노무현, 김대중정권때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한겨레, 경향신문등을 좌파 빨갱이 신문이라고 생각하고 계신다. 조선일보를 사람들이 제일 많이 보기 때문에 제일 좋은 신문이라 생각하고 계시며,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편견도 가지고 계신 것 처럼 보인다.
전에는 별로 그런 일이 없었는데, 내가 서른을 넘어서고 정치적 자의식이 강고해 진 이후로 어쩌다 집에가서 정치쪽의 화제가 나오면 우리 부자는 언성이 높아진 정치논쟁을 하기가 다반사다. 아버지와 나의 정치적관점의 차이를 깨닫고 난 후에는 가능하면 이런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번 추석때도 설핏 마신 와인 몇 잔 때문에 아버지와 핏대를 세우고 말았다.
평소에는 과묵하고 감정표현이 별로 없으셔서 용건이 있지 않고서는 내게 전화를 하는 일도 드문편이다. 스무살이 넘어서고 난 후에 내가 하는일에 대해 드러내 놓고 반대하신 적은 한번도 없는 것 같다.
그런 우리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걸 난 지금까지 딱 두번 봤다. 한번은 두어달 전의 일이고, 다른 한번은 이십몇년전쯤의 일이다.
지난 유월 육일에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흔일곱까지 장수하신데다 큰 병없이 기력이 쇠하셔서 돌아가셨으니 다른이들은 호상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장례식장에서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입관식을 한다고 유족들을 부르는 것이다. 입관실에 들어가니 유리벽 너머로 장의사 두분이 계시고 할머니가 누워 계신다. 천으로 할머니를 꽁꽁 묶고 수의를 입히고, 머리를 빗겨드리고 얼굴을 닦아 드리고, 코와 귀는 솜으로 막고 입에는 쌀을 넣어 드린다. 그 과정을 유리벽 밖에서 우리는 참관을 하고 있었는데..저쪽 구석에서 계속 쳐다보시던 아버지 갑자기 얼굴을 감싸안고 주저 앉으면서 흐느끼신다. 소리를 내서 엉엉 우신다. 큰아버지들도 다른 사촌들도 그렇게 소리내서 흐느껴 우는 사람은 없었는데..
아버지의 눈물에 대한 또 다른기억은 나의 국민학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에 나는 겨울만 되면 입술쪽에 염증이 생겨서 - 정확히 말하자면 입술 아래와 턱까지 연결되는 부분- 해마다 병원에 가곤 했었다. 나중에 의사선생님의 얘기를 들어보니 이하선염이라는 병명을 가진 아이들에게 잘 생기는 염증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 겨울에는 그 증세가 무척이나 심해서 오른쪽 볼부터 귀밑까지가 퉁퉁부어 올라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하루는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었는데, 지금 기억으로 귀밑의 부은 부분을 째고 고름을 빼낸 다음에 소염주사를 맞는 간단한 수술을 했었다. 당시에 나는 그 수술부위가 너무 너무 아파서 병원에서 비명을 지르고 계속해서 울었었다. 간호사는 옆에서 몸부림 치는 나를 붙잡고, 아버지는 옆에서 이 수술 장면을 안타깝게 지켜보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우셨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수술과정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그만 병원바닥에 쓰러지시고 말았다. 간호사가 달려가서 부축하고 그랬었지 아마. 그때의 아버지는 내게 우상은 아니더라도, 뭐든 물어 보면 알려 주고 뭐든 해 줄 수 있을것 같은 산같은 그런 존재였었는데.. 아버지가 잠깐이나마 기절했다는 건 어린 내게 무척이나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수술한 귀밑보다 마음이 더 아리고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20년이 훌쩍 지나서 듣는 환갑을 훌쩍 넘기신 아버지의 울음소리. 그때와는 다른 뭔가가 느껴진다. 아마 우리 아버지는 20년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여린 사람일 것이다.
Wand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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